족보(族譜)는 옛날 중국에서 제왕연표(帝王年表) (王室의 系統)를 기술한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사가(私家)에서 족보를 갖게 된것은 그 훨씬 뒤인 한대(漢代)에 관직(官職)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후보 인물의 내력과 그 선대에 업적(業績)등을 기록하여 비치한 것이 그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후 위(魏), 진(晋),남북송(南北宋 420~590)대에 비로소 보학(譜學)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후 북송(北宋)의 대문장가(大文章家)인 삼소(三蘇) (蘇詢과 그의 아들인 軾(東坡) 轍(樂城)형제)에 의하여 편찬된 족보는 그 편제와 규모가 우수함으로써 족보를 편찬하는 사람은 대개 이를 표본으로 삼았기 때문에소보(蘇譜)라는 말까지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역시 고려조(高麗朝)가 왕실(王室)의 계통을 기록하여 온데서 부터 시작된 것인데 고려중엽의 의종(毅宗 1150년)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실록(王代實錄)등이 그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옛날에는 성(姓)을 쓰지 아니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중국의 예를 본받아 사성(賜姓)등으로 귀족 계급에서 부터 성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고려초기(高麗初期)에도 계속되다가 문종조(文宗朝 1047~1082)에 이르러 성을 쓰지 아니하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제도화 함에 따라 성씨가 갑자기 많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성씨는 써도 족보는 기술하지 않다가 족보를 체계화 한것은 이조성종조(李朝成宗朝 1470)의 초기때 일이고 우리나라 최초 발간(發刊)된 족보는 세종 5年(1423)의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인데 서문(序文)만 전할뿐 현존하지 않고 성종 7年(1476)에 발간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로써 규장각(奎章閣)에 희귀고본(稀貴古本)으로 진장(珍藏)되어 있다.또한 같은 성씨가 대동보를 편찬(編簒) 간행(刊行)한 것은 이조에서도 후기에 속한다.